묘한 일이다. 태어나서 경희대 앞을 가 본 것은 딱 세 번 있는데 모두 지난 사흘 안의 일이다.
사흘 전 아침 걸려온 전화를 받자 마자 내가 듣게 되는 이름은 지은이었다.
이지은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나요?
목소리는 중년의 남자같았다. 남자는 차도 가까이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지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목소리가 소음에 묻히곤 했다.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알았었다고 말하는 게 맞다. 내가 스물일곱살에 알았던 여자였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삼년 전의 일이다.
제가 그 분의 지갑을 주었는데 몇 장의 명함이 있긴 하지만 연락되는 분이 당신 밖에 없네요.
아 그렇군요.
나는 명함을 만든 기억이 없다. 더군다나 나는 그 때 한양대 영화과 대학원을 다니며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어떤 사이였습니까.
네?
어째서 그런 걸 물으시죠?
남자는 잠시 후 덧붙였다.
서로 모르는 사이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친구였어요. 대학 때 친구.
그렇군요.
남자가 말했다.
친구가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사범대학에서 계약직 교직원로 일했다. 입시자료를 영상으로 남겨두어야했기 때문에 우리 과를 방문하다가 서로 알게 되었다. 그 때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조교들과 마장 체육센터 앞 마포갈비에서 술을 먹다가 조교의 회식자리에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자리를 별로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 중 두세 명과 좋지 않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좋지 않은 기억이란 대개 몸에서 끝나버린 연애를 가리킨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지글거리며 굽히는 고기의 연기 너머로 서로의 시선이 어색하게 얽혀들었다. 어쩌면 저들은 서로 나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냉냉한 기운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은 이지은에게 집중되었다. 이전에도 몇 번 보았지만 그녀에게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는데 다른 직원들과 섞인 그 자리가 무엇인가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결코 미인이라 할 수 없었지만 검은 스커트 아래로 뻗은, 검은 스타킹이 감싸고 있는 곧고 얇은 다리를 스타킹이 교차로 움직일 때, 나는 그 다리가 화장실 문 뒤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일주일 후 모두가 퇴근하고 텅빈 과사에서 만진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그녀의 가슴을 만지기 전까지 그 검은 스타킹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이미 다른 여직원이나 조교들과 내 뒷얘기를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 그 쪽이야 말로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브래지어는 독특했다.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보고 만졌던 브래지어는 와이어가 들어있고 패드가 들어있었고 가슴 모양을 잡아주기 위해서 브래지어 자체가 둥근 형태로 제작된 것이었다. 부드럽게 혀를 교환하는 동안 옷 위로 그녀의 가슴을 만졌을 때 나는 그녀가 노브라일 거라 생각했다. 드러난 그녀의 브래지어는 얇은 망사천이었다. 유두를 사이에 두고 엄지와 네 손가락이 물결치듯이 부드럽게 그녀의 가슴을 애무할 때 나른하게 의식의 뒷편, 언어를 벗어난 감흥과 즉흥의 본연으로 이끄는 클래식 기타 선율을 떠올렸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기막힌 연주였는데 탄력있고도 나긋한 나일론 줄과도 같았다. 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 번도 그녀보다 근사한 가슴을 만져본 일이 없으며 지금도 그녀를 떠올리면 그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릴 때 얼굴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 그 사람을 진정으로 느껴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얼굴이란 결국 이성의 그것이다. 반면 몸을 기억하는 것은 인공적인 인위의 의식 저편에 위치한 디오니소스의 쾌감에 관한 것이다. 어느 쪽이 우월하다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후자 쪽이 훨씬 강렬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만나고 싶은 과거의 여자를 떠올릴 때 그리 예쁘지 않았던,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녀를 고를 것이다. 내가 그녀의 지갑을 찾으러 가려고 마음 먹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회기역 알아요?
알겠습니다.
알고 있지만 가본 적은 없었다. 남자는 오전에 그곳에 계속 있어야 하니 오전내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출퇴근 할 때 타던 273번을 회사 반대편으로 타고 가면 되었다.
그 날은 휴가 였다. 정작 여자친구 때문에 휴가를 냈는데 그녀에게 일이 생기고 말았다. 우리는 매주 금요일 저녁에 만나 영화를 보거나 저녁을 먹고 그녀의 집으로 가서 섹스를 하다 잠이 들고 다음날이면 헤어어지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에 여친은 매우 화가 나있었고 우리는 휴가를 내고 2박3일 동안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날 여친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새벽에 돌아가셨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아침에 그 사실을 그녀에게 알렸다.
어째서 하필, 오늘 돌아가신 거야?
그녀는 투덜대길래 나는 어른스럽게 타일르듯 말했다.
예정을 취소해야겠군.
물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적었지만 나는 쾌재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하고 있다.
텅 빈 버스에 나 혼자 타고(물론 운전기사를 비롯해서) 고려대를 지났을 때 남자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를 떠나게 되었소. 그녀에게 전화해보았어요?
남자는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지는 가운데 최후 통첩을 전하는 하드보일드 영화의 도망자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직 받지 않아요.
나는 여기를 떠나야 해요. 그래서 이 앞 카페에 맡겨 놓았소. 그런데 한가지. 이지은씨가 어떻게 생겼어요?
나는 덜컹거리는 버스에 맞춰 한 쪽 귀를 막고 다시 그에게 물었다.
뭐라고요?
그러니까 이지은씨가 어떻게 생겼냐구요. 흔한 이름이니까. 당신이 다른 사람과 오해할 수 있잖아요.
그렇지만, 그 지갑 안에 내 전화번호가 있었다면서요. 그러니 내가 아는 사람이 맞아요.
전화번호가 바뀌었다면. 요즘은 그런 일이 흔하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나는 내 번호를 말하며, 이 번호가 분명하지 않아요?
그렇소.
나는 번호를 바꾼 적이 없어요. 최근 삼년 간은.
그것은 내가 알 수가 없지 않소.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소?
아까 물어보셨잖아요. 나는 내 이름을 말했다.
맞죠? 명함의 이름과.
맞긴 하지만. 내가 당신 먼저 당신 이름을 대며 맞죠라고 하지 않았던가?
명함의 이름이 내 것이 아니라면 왜 내가 나라고 했겠어요.
흔한이름이군.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는 명함을 만든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남자가 다시 나를 추궁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녀가 어떻게 생겼죠?
그러니까 평범하게 생겼는데.
머리 속에 그녀의 둥근 가슴이 물방울처럼 커졌다.
이봐요. 예쁘다 아니다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사진을 보니 그녀만의 특징이 있군요.
특징이요?
내가 되물었다. 그녀만의 특징? 이지은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그녀만의 특징. 무엇이더라.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특징을 말하지 않을 수 없지. 정말 모르겠소?
남자의 말투가 조금 빨라졌고 확신에 차있었다.
나는 이 곳을 떠나고 있소. 특징이 기억나면 연락하시오. 그럼 장소를 말해주도록 하지.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멍하니 전화기에 나타난 그의 전화번호의 깜빡임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내 핸드폰 대기화면으로 돌아왔다.
그 때 버스가 경희대 앞 사거리에 도착했고 나는 그곳에서 내렸다. 사거리에 회기역 앞이라 적혀있었다. 그 교차로에 서서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당연히 모르는 사람들 밖에 없었다. 남자가 있어도 그를 못알아봤을 것이다. 나는 이게 장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에서 나를 보며 키득거리고 있을 할 일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그의 번호를 남자, 라고 저장했다.
그런데 장난이라면 그는 어떻게 이지은을 얘기한 것일까. 흔한 이름이기 때문에? 장난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재미없는 장난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리가 없다. 나는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교차로 신호가 바뀌고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서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지은의 특징. 그녀의 얼굴에 두드러진 특징.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특징 뿐 아니라 그녀의 얼굴이. 그녀는 전혀 특징이 없는 게 특징인 얼굴이었다. 장난전화였다고 단정 지으면서 나는 계속, 전혀 생각나지 않는 그녀의 얼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