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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처럼 믹재거처럼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정말 놀랍지 않아? 야구장을 나오면서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고작 4회도 채우지 못하고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말하자면 이 경기에 대해 선발투수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특별히 야구를 보거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야구장에 가 본 적도 없었다. 점심을 먹고 이빨을 닦고 돌아오니 회사 선배가 옆자리에 앉은 동기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내게로 돌아서며 야구 티켓을 내밀었다. 언제냐고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오늘 경기야 라고 말했다. 전 야구에 관심이.. 선배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돌아섰다. 다음에 밥 사라. 마침 약속이 없는 수요일저녁이었기 때문에 한 손으로는 티켓을, 한 손에는 카카오톡을 만지작 거리며 함께 갈만한 사람을 찾았다.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술을 먹을 여자를 찾는 것이라면 오히려 쉬웠다. 그런데 야구를 같이 보러 갈 여자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함께 술을 마시는 것과 야구를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기 때문이다. 술은 섹스가 목적이 될 수 있지만 야구는 그럴 수 없다. 술집-모텔의 방향성이 야구-술집-모텔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추상적인 관계도다. 모텔이 목적이라면 어째서 야구를 보아야한단 말이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애인도 없고 친구도 없는 사람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위에 말한 관계도로는 애인과 친구 둘 다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사내 메신저에 즐겨찾기에 등록된 사람들은 모두 여자이다. 나는 사내 메신저가 그리 필요치 않은 회사에 일하고 있다. 우리 파트외에는 그리 접촉 빈도가 많지 않다. 나는 가끔 회사 식당에서 혹은 사내지나 인트라넷망에서 알게 된 안면 있는(또는 안면이 없지만 내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즐겨찾기에 추가해놓았다. 이름을 검색하면 사진을 볼 수 있으니까. 그들 중 몇명에게 야구티켓 이야기를 꺼내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너무 뻔한 작업이 아닌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냥 가지 않고 버리면 되지 않는가.맞다. 그러면 된다. 그러면 되는데 나는 왜 자꾸 야구티켓을 붙잡고 이런저런 궁리를 했던 것일까. 그 때 M이 떠올랐다. 내가 연락을 한 사람은 M이었다. 그녀와 나는 한 문화센터에서 했던 글쓰기 관련 강좌를 함께 들었다. 그녀는 상고를 나와서 몇 개의 회사들을 전전하며 경리일을 하던 아이였다. 1-2년 마다 회사를 바꿨다고 했다. 당시 나이가 25이었다. 왜? 내가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 다니며 알았는데, 아무런 잘못도 없는, 그런 사람들 조차도 3년을 보니 죽이고 싶어지더라. 그래서 학교가 3년인가봐. 그런데 회사라는 시스템은 꼭 누군가를 싫어할 만한 사람을 만드는데 3년까지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만날 때 마다 자기가 잤던, 혹은 잘 뻔했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농담처럼, 시시껄렁하게. 그녀는 발정났는데 그걸 주체할 수 없는 남자들의 시시하고 우스꽝스러움을 희화하하는 걸 좋아했다. 거기에는 연애를 할 만큼 한 여자라는 것, 한 편으로는 여자를 제대로(흔히 말하는 낭만적으로) 할 수 없는 여자의 한이랄까 그런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계층의 특징, 그리고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처럼 자랐던 가정 환경, 그리고 스스로 정신분열적이고 참을 성 없는 성격에 대한 체념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들을 기억하면서도 그녀를 동정하거나 또는 그 이야기에 공감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는 좋은 혀를 가지고 있었다. 버벌이 아니라 오랄에 훌륭한. 오랄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는 글쓰기도 훌륭했다. 오랄과 작문 실력 모두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랄쪽으로 단련되고 훌륭할 여건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글이란 문체의 영향이 큰데, 그녀는 의식적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된 것을 성취해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음악을 들었지만 가끔 글을 쓰고 가끔 노래를 했다. 언젠가 그녀는 누군가의 소설을 읽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소설가들은 어째서 이렇게들, 야구에 관심이 많은 것일까. 그건 아무래도 야구는 중간에 쉬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지 않을까? 휴식시간 동안 뭔가 생각할 시간을 주는거지. 하루키도 예전에 헛점이 있는-여유가 있는 음악이 듣기에 편한하고 나이가 들 수록 끌린다고 하던데. 나도 그녀도 당시에는 야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만날 때 마다 술을 먹고 모텔에 갔기 때문이다. 처음 만날 때는 8:2 정도 대화와 섹스의 비율이었던 것이 한달이 지나자 2:8이 되었다. 서로의 지식에 대한 연료탱크가 작았던 것이다. 그녀는 예민한 감수성만큼 다량의 독서와 작문을 하지 못한 탓이다. 감수성에 비해 데이터가 풍부하지 못한 탓이다. 이후에 그녀와 만나는 것은 일년에 한 번 정도가 되었다. 반년만에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할까하고 신고가 가는 동안 생각하다가 덜컥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소리라는 것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모르겠는데, 그건 분명 그녀의 목소리였다. 야구를 보러 가는 게 어때? 대뜸 그렇게 묻고 말았다. 말이 목구멍에 맴돌다 스스로 튀어나가버렸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너구나. 마치 지난 주 쯤에 만났던 친구를 대하듯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였다. 나이는 내가 몇 살인가 더 많지만 그녀는 나에게 오빠,라는 말은 해본 적이 없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열네살차이가 나든 동갑이든 모두가 나를 어떤 동등한 느낌을 가지고 대했다. 대체 나의 무엇이 그럴까. 그것은 아마 내가 그들에게 무엇인가 강요하거나 또는 바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응 오랫만이지. 그 다음부터는 야구이야기는 까맣게 있고 서로의 안부를 주고 받았다. 아무 일 없이 산다, 라는 결론이 난 후 잠깐 침묵이 찾아왔다. 그녀가 그제야 되물었다. 야구를 보러가자고? 야구.. 아 내가 티켓이 생겼는데. 보러가자는 말이야. 야구가 재밌어? 아니. 몇 번 가보진 않았지만. 그런데 왜 가려는 건데.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한 번 가봐야하는 거 아닐까? 너 여전히. 그녀가 낮게, 마치 벤치 옆에 튀어나온 나무 밑둥을 걷어차듯 툭툭 웃으며 말했다.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말들만 하는구나. 언젠데. 응, 두 시간 삼십 칠분 후야. 그녀가 그 사이 회사를 옮겼다는 것과 우리 회사와 걸어서 십오분 밖에 떨어져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년만에 다시 만나도,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나도 우리는 그전에 입을 맞추었던 잠을 잤던 사이임에도, 손을 잡게 되는데 삼십분 정도가 걸렸다. 만날 때 마다 처음 만나는 사이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말로는 그 이유는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여자들과도 비슷한 거 같았다. 대체 그 차이가 뭘까? 내가 물었다. 너는 모든 것에 정의를 내리려고 해. 이름을 붙이려 하고. 차이를 구분하려하지. 바로. 그거야. 나는 야구팀이나 선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아는 것은 공을 던져서 방망이로 그걸 휘둘러 쳐야한다. 그리고 그게 담장을 넘어가면 홈런이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아리가또와 사요나라 두 단어만 알고 일본 여행을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야구장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작고 불편한 플래스틱 좌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도 사람들은 즐거워보였다. 오분도 지나기 전에 엉덩이가 쑤셨다. 정말 소설가가 되기는 힘든 거구나.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관중이 되기보다 야구 선수가 되는데 더 쉽겠어. 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삼회까지만 보고 나온 것은 적어도 딱 한 타선이 도는 것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왜 저렇게 작은 사람이 야구를 하는거야? 저 사람도 선수인거야? 게임이 시작하고 나온 1번 타자를 보며 말했다. 그럼 꽤 잘하는 사람이야. 아. 우리나라 국가 대표이기도 해.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움직였다. 저런 사람이 훨씬 잘 할 것 같은데. 그녀는 덕 아웃 앞에 서있는 덩치가 좋은 남자를 가리켰다. 저 사람은 4번타자야. 홈런 타자기 때문에 저런 게 덩치가 좋은 거지. 홈런을 쳐야 좋은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런데 저 1번 타자처럼 날렵한 친구들도 필요해. 안타제조기야. 저래 뵈도. 그렇지만, 홈런타자들만 9명으로 한 팀을 만들면 훨씬 더 점수를 쉽게 내는 거아냐? 그야 그렇지.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가 않아. 홈런 타자들은 좀 희귀하니까. 좋은 것은 많지 않잖아. 음 그런가. 그녀가 미심쩍어하듯 고개를 가로 저을 때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안타를 친 것이다. 저것보라고. 안타제조기라니까. 그렇다고 점수를 낸 것은 아니지? 홈으로 들어와야 점수가 나잖아. 두고봐 시발점이 될테니까. 우리는 잠시 묵묵히 시합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 회에 유일한 안타였다. 그럼 이대로 끝나버린거야? 응 그렇지. 하지만 수비를 한 번 하고 나면 다시 공격할 기회가 돌아올 거야. 수비는 어떤 사람들이 하는거야? 어떤 사람이냐니? 공격했떤 사람들이 수비 역시 하는 거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다면 몸이 빠르고 날렵해보이는 1번타자들이 수비를 더욱 잘하겠네. 바로 그래. 그래서 덩치 큰 홈런 타자들만을 출전시킬 수 없는거라고. 야구란 이런 거군. 뭔가 밸런스를 유지해야하는 거. 그런거야. 밸런스를 유지해야하는 것이지. 한 쪽으로 치우치기만 한다면 결국 그게 독이 되버려. 그 때 그녀가 무릎을 탁 내리쳤다. 생각해보니 양손을 마추쳤다. 왜 그래. 굉장한데. 이건 마치. 이건 마치 뭐? 거대한 하나의 사회 같네. 그래?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역활이 있고, 적재적소에 사용하기도 하고, 공격과 수비가 명확히 구분되는. 그리고 밸런스를 찾는. 이래서 사람들이, 특히 소설가들이 야구 좋아하는 것이구나. 특히 어떤 점이. 이건 마치 소설을 써내려가는 거 같잖아. 살아있는 체스를 두는 것과 같아. 축구와는 전혀 달라. 축구를 볼 때는 뭐랄까. 그 구조가 추상화되지 않아서 좀 시시했거든. 뭔가 혼재되고 복잡하고 지저분한 느낌도 있고. 야구는 매우 정형화되어있고 체계가 잘 잡혔네. 언어적으로 훌륭해. 그래서 추상화가 쉽네. 마치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그 실제와 연결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의 말은 매우 명확했고 그랬기에 듣는 동시에 논리가 이해되었다. 한편으로 반년 사이에 뭔가 변한 것 같았다. 감수성은 여전했지만 스스로의 생각을 구조적으로 정리해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할까? 어쩐지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 하는 거 같네.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되물었다. 뭐라고? 이제 나가자고. 그래 그러자. 우리는 응원 구호로 덮은 야구장의 공기막을 뚫고 서롤를 향해 고함쳤다. 그렇게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만으로 스스로도 모르게 웃는 얼굴이 된다. 그래서 단체 속에서 응원을 하게 되는 것 같았다. 야구장에서 나와 우리는 신촌에 가서 술을 먹었다. 나는 낮에 한 생각을 말했다. 야구장-술집-모텔로 이어지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아. 이러저러한 뜻이라고 설명을 하자 그녀가 낄낄 거리며 참치회 한 점을 집어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붉은 참치회가 젖가락에 집어져서 목구멍 안으로 깊게 밀어넣었다. 말 그대로 혀 위에 올려넣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목구멍까지 들어가게 깊숙이 넣었다. 너 설마 그냥 삼킨 거야? 입을 꼭 다문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다시 씹기 시작한 후 그녀가 말했다. 아니 그럴리가 없지. 난 회를 먹을 때 목구멍에 질식하게 밀어넣고 녹인 후 먹는데, 꼭 그거 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괜히 주위를 한 번 살펴본 후 씨익 웃고 대꾸를 하지 않은 채 회 한 번을 목구멍 깊숙이 밀어넣었다. 그러다 목젖을 건드렸는지 기침을 연거푸하고 말았다. 야구장-술집-모텔말야. 그럴 듯 해. 야구장에 나와서 모텔로 이어지는 건 좀 시시한 일이야. 그런 거 같아. 섹스를 못하는 시시한 인간이나 전쟁을 하는 거니까. 어째 무라카미 류같은 말이네. 그러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건 오빠의 추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추상이 부여하는 의미는 거창하지만 그 실체는 정말 초라한 경우가 많거든. 그리고 우리 삶은 저런 야구보다 훨씬 복잡하고 더 많은 우연에 좌우해. 그러니 야구를 보는-스포츠를 보는 사람들은, 현실에서 실체를 분명히 끌어낼 수 없는 사람들이나 보는거야. 소설가들이 삶을 거짓의 구조에 밀어넣고 다시 거기서 진실을 추출하는 것도 비슷해. 그래서 좋아하나봐. 추상화의 힘 그리고 그것의 독.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아니 그것보다 너 요즘 대체 무슨 책을 읽는거야? 아니면 누구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는거야? 전혀 다른 사람 같잖아. 그녀는 여러 점 놓은 참치회 중에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까 전에 참치회를 처음먹는다고 말했지. 그건 사실이야. 근데 한 눈에 이게 이 중에 가장 맛있는 분위가 맞지? 맞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혼마구로였다. 오늘 나온 것 중에 가장 훌륭한. 어떻게 그런 걸 알지? 이해할 필요 없어. 오빠. 진짜 좋은 것은 추상화, 개념화 할 필요없어. 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왜 알아서 보려고 하는건데. 그니까, 오늘 내 자궁에 오빠 자리가 있어. 있으니까 이제 제발 말 좀 그만해. 그녀는 들고 있는 회 한 점을 집어 내 입 속에 밀어 넣었다. 목구멍 가까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득하게.

안경 쓴 여자의 죄인가 안경의 죄인가 02:45



그는 몸무게가 110키로그램 정도 나갔어요.
섹스가 끝난 후 그녀는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전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유혹 한국어와 영어 사이에 발음의 차이가 심했다. 마치 한글 전환키를 누르기 위해서 애플 키보드를 누르는 듯 버벅거림이 있었고, 영어 발음은 유독 부드러웠다. 그녀는 70kg 정도로 보였다. 혹은 그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녀의 전남친과 그녀가 걷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내가 별다른 대꾸가 없자 그녀는 말을 멈추고 나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오빠는 어떤 여자를 싫어해요?
특별히 그런 것은 없는데.
싫어하는 사람 없어요?
나는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귀찮게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안경 쓴 여자.
안경 쓴 여자가 무슨 죄가 있어요?
내가 빨강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검정색이 죄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것은 그렇지요.
세상에는 세가지 사람이 있어. 남자, 여자,
안경 쓴 여자요?
그녀가 내 말을 잘랐다.
응 그렇지. 안경을 쓴 여자와는 섹스를 하고 싶지도 않아.
한국 사람에게 세가지 사람 있는 것 아니에요? 남자 여자 아줌마.
나에게 아줌마도 상관없어.
왜요?
나는 독신주의자니까. 그래서 상대가 결혼하든 하지 않든 전혀 상관이 없는거야.
그녀의 방은 이층이었고 도로와 인접해 있었다. 그래서 닫혀진 창으로 미세하게 행인들의 말소리가 한 두 마디씩 들려왔다. 그 말은 잘려져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이었다. 한 남자는, 어젯밤 ***과 지나*** 라고 말했고 어떤 아줌마는 요쿠르트볼라토시나가 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듣는 것이 그녀의 질문을 받는 것보다 나을 듯 했다.
안경 쓴 여자.
나는 안경 쓴 여자를 전혀 싫어하지 않았으나, 어떤 여자들은 꼭 섹스 후에 누구를 좋아하느냐, 전 여자친구는 어떻게 생겼느냐는 식의 질문을 해댔다. 언젠가 부터 나는 거짓 대답을 하는 것이 내가 이상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보다 쉽고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녀들에게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설명하는 게 더 쉽지, 라고 대꾸한 후에 안경 쓴 여자를 싫어한다는 대답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삼십 안에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 그녀의 책상 앞에 이런 메모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7시 이후에 아무것도 먹지 않기. 다른 메모는 모두 중국어였는데 그것만은 한국말이었다.
빨리 나가야 네가 오늘 저녁을 먹을 수 있겠는데?
네. 뭐 먹으러 갈래요? 어떤 음식 좋아해요?
맙소사, 그녀가 또 좋아해요 놀이를 시작했다.
아, 싫어하는 음식있어요?
안경 쓴 여자가 만든 음식을 싫어하지.
내가 말하면서 일어나 팬티를 찾기 위해 이불을 걷었다.

나는 오빠의 presenting self가 궁금해요.
내가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그 보다 오빠의 perceived self가 더 궁금해요.
역시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안내한 중화요리집은 정말로 대단해서 무뚝뚝한 내 얼굴 아래에 놀라운 표정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으려고 애를 썼다. 어째서인지 그녀에게 나는 무척이나 냉담한 사람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올해 내가 가졌던 목표, 첫 인상을 끝까지 유지시켜보기에 해당되는 행도이었다.
한편으로 쉴새없이 말을 뱉어내는 그녀의 언어적인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는 서울'에' 살아요와 서울'에서 살아요의 차이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내게 물어보곤 했다.
그것들은 아무런 차이도 없어. 똑같이 쓰여.
나는 오히려 그녀의 생각을 읽고는 그렇게 말했다.
너는 말이 너무 많은 데, 문제는 그 말 중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는 데 있어. 그것은 굉장한 실수야.
옳게 표현하는 게 실수하는 것이라고요?
왜요? 문법이 정확하면 안되요?
나는 이미 음식을 다 먹고 땀을 닦으며 짬뽕을 먹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삶 자체와 더 멀어지기 때문이지.
그녀가 잠깐 먹는 것을 멈추고 눈알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오빠는 오빠만큼 똑똑한 여자를 찾는 것 같지만, 똑똑한 여자를 만나면 싫어할 것 같아요. 그리고 오빠는 따뜻한 사람인데, 확실히 언어적인 문제가 있어요. 지각된 것을 처리할 때 오류같은 것들이 쌓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왜곡되게 들어온 영상을 그대로 세상 자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스스로의 감각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요. 그렇지 않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예술가적인 기질을 말하는 것이에요. 예술가는 온전히 자신의 감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요. 두번째가 없어도 예술가가되지만 두번째가 없으면 예술가라 불려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예술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니까요.
나는 70kg의 중국인 여자와 가끔 밥을 먹고 섹스를 한다. 나는 40kg의 학생과도 섹스를 한다. 나는 누구와도 섹스를 한다. 나는 그녀들이 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듣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거부하기 위해 듣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누가 나에게 말을 할 때마다 그들과 나 사이의 공간을 그려본다. 그녀들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 공기를 진동시키고 내 달팽이관으로 빨려들어가 언어화된 작업을 거치는 과정 같은 것 말이다. 그들이 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내가 하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 내 말이 어떻게 전달되고 외곡되는가에 대해 관심이 많다. 여자의 몸무게는 중요하지 않다. 안경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말이고 말과 말사이에 시간이 들어가서 생겨나는 내러티브이다. 그러다보면 누구와도 감동을 받을 수가 있다.
너는 전혀 실체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구나. 나르시스야. 너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보면 오히려 타인의 말에만 휩쓸리게 돼. 묘하지?
마지막으로 잠을 잔 두 아이를 뒀던 여자가 말했다. 일반적으로 나이든 여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눈에만 의존하지 않는데 있다. 그러한 균형은 무서운 것이다. 균형을 지닌 자의 말은 파괴력이 있는데 그 나이가 되면 질문이 없어진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명백한 것들에 끌리게 되는 것이 나이 먹읆의 가장 큰 단점이라 했다. 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모두 현명해지고 싶어하지만 어린 사람들을 옆에 두려는 이유는 바로 그 균형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어가 근본적으로 삶을 담을 수 없어서이기도 하니까.
아, 쌀국수도 맛있는 데 먹고 싶다.
중국 여자는 짬뽕국물에 젖가락을 쑤셔 넣으며 '쌀국수'도 맛있는 데 먹고 싶어했다고 했다.
중국 여자가 짬뽕국물에 젖가락을 쑤셔 넣으며 '쌀국수'도 맛있는 데 먹고 싶어했다.

부드럽게 대명사가 되어줘요 02:45


사오리가 일본으로 간 후 나는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잤다. 그녀와의 나흘 간은 몸 속에 물기가 빠져나가버릴 만큼 지독하게 섹스에 매달렸다. 그녀는 나에게 몇 개국의 여자와 잠을 잤냐고 물었다.
일본, 한국, 중국 그리고 아일랜드.
내가 말했다. 그녀는 일본 특유의 에에~ 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나는 당신이 처음이야, 외국인과 잠을 잔 것은 처음 이라 말했다.
이번에는 영어로 말했다. 그녀는 내 이름이 아니라 you 라고 나를 가리켰다. 일본에는 당신, 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았고 그녀는 주로 you 가 아니라 내 이름을 불러줬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you 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뭔가, 한국 전체와 섹스를 하는 기분이야.
그 표현이 나는 좋았다.
국가대표로써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일본여자는 처음이었고, 그녀가 일본의 대표이고, 일본 전체와 섹스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오리는 조금만 허리를 움직이면 그만, 하며 나를 당겨 안았다. 내가 멈추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더욱 세차게 나를 저지 시켰다. 일본 여자가 그러한 것인지 그녀만 그런 것인지 그녀는 금방 high 에 올랐고 나는 오분 마다 한 번 씩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녀는 잠시 쉰 후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나는 튜브를 타고 부드럽게 물결치는 바다에 떠있는 것처럼 안락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스고이 기모찌, 라는 말을 내뱉을 때 나는 웃고 말았다. 그 말은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알만한 것이었는데 나 역시도 그 말이 야동 배우들이나 쓰는 어떤 재팬 포르노의 관습적인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오리와 지낸 후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말로는,
일본어는 매우 어휘가 부족하기 때문에 상태를 표현하는 말도 매우 적다고 했다. 그렇군,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기습적으로 더욱 허리를 움직였다. 방심한 그녀가 다시 소리를 지르며 스톱, 이라고 나를 말렸다. 그녀는 나를 hard 하다고 그리고 일본 남자는 weak 하다고 말했는데 그게 일본 남자의 성기가 무른 것인지 아니면 정력이 떨어진다는지 디테일하게는 물을 수가 없었다. 사오리와 나는 그런 사흘후면 헤어져야 할 그래서 디테일은 어째도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마냥 행복하고 재미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말은 때로 지나치게 명확하기에 서로를 오해하게 만드니까.
명동 롯데 호텔은 일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지갑을 가지러 올라간 후 로비에서 멀뚱히 앉아 있던 나는 이 안에 있는 한국인은 나와 스탭 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명동에도 마찬가지였다. 대낮의 명동은 일본과 중국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대체 명동에서 무엇을 하는가. 사오리와 나는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일렀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커피를 마시자.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와 스타벅스로 가서 두유를 넣은 커피와 치즈를 넣은 베이글을 먹었다. 이런 아침을 먹기는 오랫만이었다. 뭔가, 뭔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써놓고 보면, 된장스럽지 않는가.
무엇을 하고 싶어?
내가 물었다.
너희 집에 가고 싶어.
당연히 나는 그녀를 내 집으로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우리 집에 가려는 거야. 너는 일 년만에 한국에 왔어. 그런데 고작 하고 싶은 일이 내 집에 가고 싶은 거야? 그것은 시간 낭비야.
그녀는 입을 삐죽거렸다. 나는 내 방은 청소가 되어있지 않고 지저분하다고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틀 전 자고 갔던 뤼엔의 머리카락이 방 구석을 돌아다닐 것이다.
내가 청소를 해줄께.
그녀가 집요하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더이상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남자들은 여자의 집에 가고 싶을 때 섹스를 하기 위해서인데 여자들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서? 어쩌면 환경과 인간의 상관관계를 본능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영화감독들 아니면 여자들일 지도 모른다. 집안을 꾸미는 여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스스로를 정의내린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국에서 만나는 외국인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는 것은 좀 더 여자에게 색다른 기분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를 둘러싼 언어와 관습과 관계들을 벗어나 완벽한 외계의, 자신에게 영향을 크게 미치지 않는 남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는 색다른 기분에 빠질 것이다. 더 쉽게 흥분하고 더 깊이 사랑한다고 착각을 느낄 수도 있다. 사흘 뒤면 완벽하게 끝내버릴 수 있으니 완벽한 사랑인 채 가정해도 좋은 것이다. 가정이란 생각조차 지워버려도 상관이 없으니.
경복궁이 화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 것을 알지 못했다. 허탕친 우리는 광화문쪽으로 나와 극장으로 갔다. 검색해보니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일본영화는 '진짜로 일어 날찌도 몰라, 기적' 이라는 영화였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오다기리죠, 밖에 없었는데 그녀 말로는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 모두 유명하지만, 할머니로 나오는 여자가 굉장히 유명하다고 했다.
할머니가 유명하다고?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말 유명하다면 내가 알아야 되잖아?
내가 물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빤히 보았다.
그건 정말 그렇네요.
우리는 웃으며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는 따분했다.
너무 착한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는 마음에 들지 않아. 그것은 가짜니까.
마침 같은 극장에서 밀레니엄;용문신을 한 여자가 상영하고 있었다.
나는 저걸 더 좋아해. 그녀는 밀레니엄의 루니 마라를 매우 좋아했다. 그녀는 검정옷을 좋아했다.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느낌의 패션을 좋아했다.
저건 어쩐지 일본스럽지가 않으니까. 잘 알면 관용가 타협할 수가 없어.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영화 상영도중에 빠져나왔다.
그녀의 가방에는 삼성의 길, 인가 하는 책이 있었는데 내가 잠깐 은행에 들려야 했을 때 그걸 꺼내 기다렸다.
삼성을 정말 대단해, 하고 말하더니 그렇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삼성주 분식회계라든가 불법 승계라든가 하청업체들에 대한 짜내기 관행들을 떠올려서 말하려다가,
... 그렇게 좋은 측면만 있지는 않아 라고 간단히 말했다.
역시 깊이 알게 되어야만 나쁜 것들을 알고 있는 것이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다 좋은 것만 보이는 것이고.
내 차례가 되어서 카드의 한도를 조절했는데, 생각해보니 은행에 굉장히 오랫만에 온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낯설게 보이는 것은 사오리, 때문일까?
우리는 청계천 옆 커핀그루나루(이름이 맞나?)에서 홍차를 마셨다. 지금까지 그녀는 내가 마시는 것들을 그대로 시켰다.
말없이 홍차를 마셨고 내일이면 그녀가 일본으로 돌아가야했다. 그리고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끝이군.
내가 말했다.
그렇군.
그녀가 말했다. 뜨겁운 홍차는 다즐링이었다. 그러나 다른 홍차였어도 나는 차이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은 경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익숙치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어? 일본에 가면 뭘 할꺼야?
똑같이 살게 되겠죠.
아 그렇지. 내가 웃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 말이에요. 지금까지 누구를 만나면 항상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어. 그러나 당신과 있으면서는 단 하나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어. 그래서 일본에 가면 거짓말을 하고 싶어요.
어째서 거짓말을 해?
그렇지 않고는 제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중급 인간인 것이에요. 애당초 그런 것입니다. 중급 인간은 삶의 터전을 떠나야만 제대로된 인간이 되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댔다. 그러나 이미 홍차를 다 마셔서 빈잔이었다. 그걸 알아 차린 후 그녀가 나를 보고 웃었다.
낯선 것들을 만나지 않고서는 돌파할 수가 없는 것이네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점점 좋아졌다. 아마 곧 떠나기 때문일 것이다.

불분명네가가져다준불만기억하겠네 02:45


거기에 없다면 거기가 없어서가 아니야 02:45

 묘한 일이다. 태어나서 경희대 앞을 가 본 것은 딱 세 번 있는데 모두 지난 사흘 안의 일이다. 
 사흘 전 아침 걸려온 전화를 받자 마자 내가 듣게 되는 이름은 지은이었다.
 이지은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나요? 
 목소리는 중년의 남자같았다. 남자는 차도 가까이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지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목소리가 소음에 묻히곤 했다.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알았었다고 말하는 게 맞다. 내가 스물일곱살에 알았던 여자였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삼년 전의 일이다. 
 제가 그 분의 지갑을 주었는데 몇 장의 명함이 있긴 하지만 연락되는 분이 당신 밖에 없네요.
 아 그렇군요. 
 나는 명함을 만든 기억이 없다. 더군다나 나는 그 때 한양대 영화과 대학원을 다니며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어떤 사이였습니까.
 네?
 어째서 그런 걸 물으시죠?
 남자는 잠시 후 덧붙였다. 
 서로 모르는 사이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친구였어요. 대학 때 친구.
 그렇군요.
 남자가 말했다.
 친구가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사범대학에서 계약직 교직원로 일했다. 입시자료를 영상으로 남겨두어야했기 때문에 우리 과를 방문하다가 서로 알게 되었다. 그 때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조교들과 마장 체육센터 앞 마포갈비에서 술을 먹다가 조교의 회식자리에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자리를 별로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 중 두세 명과 좋지 않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좋지 않은 기억이란 대개 몸에서 끝나버린 연애를 가리킨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지글거리며 굽히는 고기의 연기 너머로 서로의 시선이 어색하게 얽혀들었다. 어쩌면 저들은 서로 나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냉냉한 기운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은 이지은에게 집중되었다. 이전에도 몇 번 보았지만 그녀에게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는데 다른 직원들과 섞인 그 자리가 무엇인가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결코 미인이라 할 수 없었지만  검은 스커트 아래로 뻗은, 검은 스타킹이 감싸고 있는 곧고 얇은 다리를 스타킹이 교차로 움직일 때, 나는 그 다리가 화장실 문 뒤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일주일 후 모두가 퇴근하고 텅빈 과사에서 만진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그녀의 가슴을 만지기 전까지 그 검은 스타킹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이미 다른 여직원이나 조교들과 내 뒷얘기를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 그 쪽이야 말로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브래지어는 독특했다.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보고 만졌던 브래지어는 와이어가 들어있고 패드가 들어있었고 가슴 모양을 잡아주기 위해서 브래지어 자체가 둥근 형태로 제작된 것이었다. 부드럽게 혀를 교환하는 동안 옷 위로 그녀의 가슴을 만졌을 때 나는 그녀가 노브라일 거라 생각했다. 드러난 그녀의 브래지어는 얇은 망사천이었다. 유두를 사이에 두고 엄지와 네 손가락이 물결치듯이 부드럽게 그녀의 가슴을 애무할 때 나른하게 의식의 뒷편, 언어를 벗어난 감흥과 즉흥의 본연으로 이끄는 클래식 기타 선율을 떠올렸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기막힌 연주였는데 탄력있고도 나긋한 나일론 줄과도 같았다. 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 번도 그녀보다 근사한 가슴을 만져본 일이 없으며 지금도 그녀를 떠올리면 그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릴 때 얼굴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 그 사람을 진정으로 느껴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얼굴이란 결국 이성의 그것이다. 반면 몸을 기억하는 것은 인공적인 인위의 의식 저편에 위치한 디오니소스의 쾌감에 관한 것이다. 어느 쪽이 우월하다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후자 쪽이 훨씬 강렬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만나고 싶은 과거의 여자를 떠올릴 때 그리 예쁘지 않았던,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녀를 고를 것이다. 내가 그녀의 지갑을 찾으러 가려고 마음 먹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회기역 알아요?
 알겠습니다. 
 알고 있지만 가본 적은 없었다.  남자는 오전에 그곳에 계속 있어야 하니 오전내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출퇴근 할 때 타던 273번을 회사 반대편으로 타고 가면 되었다.
 그 날은 휴가 였다. 정작 여자친구 때문에 휴가를 냈는데 그녀에게 일이 생기고 말았다. 우리는 매주 금요일 저녁에 만나 영화를 보거나 저녁을 먹고 그녀의 집으로 가서 섹스를 하다 잠이 들고 다음날이면 헤어어지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에 여친은 매우 화가 나있었고 우리는 휴가를 내고 2박3일 동안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날 여친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새벽에 돌아가셨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아침에 그 사실을 그녀에게 알렸다. 
 어째서 하필, 오늘 돌아가신 거야?
 그녀는 투덜대길래 나는 어른스럽게  타일르듯 말했다.
 예정을 취소해야겠군. 
 물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적었지만 나는 쾌재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하고 있다.
 텅 빈 버스에 나 혼자 타고(물론 운전기사를 비롯해서) 고려대를 지났을 때 남자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를 떠나게 되었소. 그녀에게 전화해보았어요? 
 남자는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지는 가운데 최후 통첩을 전하는 하드보일드 영화의 도망자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직 받지 않아요.
 나는 여기를 떠나야 해요. 그래서 이 앞 카페에 맡겨 놓았소. 그런데 한가지. 이지은씨가 어떻게 생겼어요?
 나는 덜컹거리는 버스에 맞춰 한 쪽 귀를 막고 다시 그에게 물었다.
 뭐라고요?
 그러니까 이지은씨가 어떻게 생겼냐구요. 흔한 이름이니까. 당신이 다른 사람과 오해할 수 있잖아요.
 그렇지만, 그 지갑 안에 내 전화번호가 있었다면서요. 그러니 내가 아는 사람이 맞아요.
 전화번호가 바뀌었다면. 요즘은 그런 일이 흔하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나는 내 번호를 말하며, 이 번호가 분명하지 않아요?
 그렇소.
 나는 번호를 바꾼 적이 없어요. 최근 삼년 간은.
 그것은 내가 알 수가 없지 않소.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소?
 아까 물어보셨잖아요. 나는 내 이름을 말했다. 
 맞죠? 명함의 이름과.
 맞긴 하지만. 내가 당신 먼저 당신 이름을 대며 맞죠라고 하지 않았던가?
 명함의 이름이 내 것이 아니라면 왜 내가 나라고 했겠어요.
 흔한이름이군.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는 명함을 만든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남자가 다시 나를 추궁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녀가 어떻게 생겼죠? 
 그러니까 평범하게 생겼는데.
 머리 속에 그녀의 둥근 가슴이 물방울처럼 커졌다.
 이봐요. 예쁘다 아니다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사진을 보니 그녀만의 특징이 있군요.
 특징이요?
 내가 되물었다. 그녀만의 특징? 이지은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그녀만의 특징. 무엇이더라.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특징을 말하지 않을 수 없지. 정말 모르겠소?
 남자의 말투가 조금 빨라졌고 확신에 차있었다. 
 나는 이 곳을 떠나고 있소. 특징이 기억나면 연락하시오. 그럼 장소를 말해주도록 하지.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멍하니 전화기에 나타난 그의 전화번호의 깜빡임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내 핸드폰 대기화면으로 돌아왔다.
 그 때 버스가 경희대 앞 사거리에 도착했고 나는 그곳에서 내렸다. 사거리에 회기역 앞이라 적혀있었다. 그 교차로에 서서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당연히 모르는 사람들 밖에 없었다. 남자가 있어도 그를 못알아봤을 것이다. 나는 이게 장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에서 나를 보며 키득거리고 있을 할 일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그의 번호를 남자, 라고 저장했다.
 그런데 장난이라면 그는 어떻게 이지은을 얘기한 것일까. 흔한 이름이기 때문에? 장난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재미없는 장난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리가 없다. 나는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교차로 신호가 바뀌고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서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지은의 특징. 그녀의 얼굴에 두드러진 특징.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특징 뿐 아니라 그녀의 얼굴이. 그녀는 전혀 특징이 없는 게 특징인 얼굴이었다. 장난전화였다고 단정 지으면서 나는 계속, 전혀 생각나지 않는 그녀의 얼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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